블로거 Report
2009/01/29 18:29
'영원한 이방인' 장명부 (1)
[야구타임스 ㅣ 손윤 기자] 1983년의 한국 프로야구는 대이변의 한 해였다. 전년도 우승팀인 OB 베어스와 영원한 우승 후보라는 달갑지 않는 꼬리표를 단 삼성 라이온즈가 대몰락한데다가, 최동원의 영입으로 기대치가 한껏 부풀었던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해태 타이거즈와 MBC 청룡이 각각 전후기리그를 제패하였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보너스의 지급 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은 MBC 청룡에게 완승을 거두면서 격변의 한 해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1983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팀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해태 타이거즈가 아닌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1982년에 전후기를 합쳐서 15승(65패)밖에 거두지 못한 슈퍼스타즈가 타이거즈와 청룡에게 아쉽게 밀려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무려 52승 47패 1무를 기록할 것이라고는 미아리의 벼락맞은 대추나무집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1982년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전력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승리의 기쁨을 맛 본 슈퍼스타즈의 1983년도 사실은 시즌 전에는 암울함 그 자체였다. 임호균과 김진우라는 국가대표 배터리와 베어스의 동냥으로 정구선 등이 보강되었지만, 타 팀의 전력보강과 비교하면 전력보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결국 구단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KBO는 슈퍼스타즈와 타이거즈에게 로또를 구입할 기회를 주었고, 슈퍼스타즈는 울며 겨자먹기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반신반의했던 로또는 대박을 터트려서 아마 한국프로야구에서 앞으로 깨지지 않을 30승을 슈퍼스타즈에게 안겨 주었다. 그 로또의 이름은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친숙한 장명부였다.
엑스트라에서 조연으로
장명부는 1950년 12월 27일 돗토리현에서 태어나서 지역의 야구 명문고로 이름높은 돗토리니시고교에 입학해서 팀의 간판투수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고교 3년 동안에 전국 무대인 코시엔 대회를 밟는데는 실패하였다. 코시엔을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데는 실패했지만, 지역의 강호로 군림했던 돗토리니시고교의 에이스였기에 많은 프로 팀들의 주목을 받았다. 국적이 한국인 관계로 드래프트의 대상이 아닌 자유계약으로 1968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었다.
여담이지만, 1968년의 드래프트는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다. 열혈 남아로 불리는 호시노 센이치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약속파기로 주니치 드레곤즈로 가게 되면서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또한 시즈오카상고를 준우승으로 이끈 1학년이던 김일융이 자퇴를 하면서 메이저리그 구단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까지 가세한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요미우리의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일본의 중학교, 고교, 대학을 다닌 적이 있는 선수는 드래프트 대상에 포함되도록 개정되는 소동도 있었다.
입단 첫해인 1969년에는 2군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눈물젖은 빵을 먹었던 장명부는 1970년에 부상으로 시름하고 있던 김일융을 제치고 먼저 1군에 데뷔하였다. 11경기에 등판해서 승리없이 3패만을 거두었지만, 신인치고는 준수한 방어율 3.07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요미우리는 V9의 주역이었던 호리우치를 정점으로 해서 타카하시, 세키모토, 와타나베 등으로 마운드가 물생 틈 없이 짜여져 있어서 무명의 장명부가 들어갈 틈은 없었다.
게다가, 부상에서 회복한 김일융 등으로 인해 1971년과 1972년에는 각각 2경기와 5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다. 두터운 1군 마운드를 뚫지 못하고 무명의 2군선수로 야구 생명이 끝날 것으로 보였던 장명부에게 시즌이 끝난 후에 생각하지도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토미타 마사루의 트레이드 대상으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퍼시픽리그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한 것이다. 당시 난카이에는 일본 제일의 포수인 노무라 테츠야가 감독겸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노무라 재생공장'으로 불릴만큼 투수 리드가 뛰어난 노무라라는 절대적인 존재와 얕은 투수층으로 인해 장명부는 2군으로 강등될 걱정 없이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1973년에 세인의 스포트라이트는 20승을 거둔 팀 동료인 야마우치에게 집중되었지만, 장명부도 27경기에 등판해서 7승 7패와 함께 140과 2/3이닝을 던지면서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일본시리즈의 상대는 8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기량을 알아주지 않았던 전 소속팀인 요미우리였다. 장명부는 리벤지를 다짐하였지만, 1패를 기록하는 등 요미우리가 9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조센징이라는 차별을 받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직업 야구선수를 향해 달린 장명부로서는 1973년의 활약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또한 폐쇄된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던진 한해였던 셈이다. 1974년에는 10승에 단 1승 모자란 9승을 거둔 장명부는 1975년에는 에모토와 함께 팀내 최다승인 11승(12패)을 거두면서 당당히 팀의 주축 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188이닝을 소화하는 등 무리한 투구 때문인지 1976년에는 6승 7패 1세이브를 기록하는 부진을 보였고, 팀내 위상도 불펜 요원으로 추락하였다. 야마우치, 나카야마, 후지타, 사토 등으로 선발 마운드가 짜여지면서, 다시 한번 트레이드의 대상이 된 장명부는 센트럴리그의 히로시마 카프로 이적하였다. 1975년에 처음으로 센트럴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히로시마 카프는 열성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는 구단으로 매우 유명하다.
리그 우승 이후, 중위권으로 떨어진 히로시마 카프는 1977년에 트레이드를 통해서 전력 보강을 꾀하면서 재도약을 꿈꾸었지만, 시즌 개막과 함께 하위권으로 추락한 성적은 회복하지 못하고 6팀 중에서 5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장명부도 6승 6패 5세이브로 여전히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시즌 후반기에 예전의 구위를 회복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간직한 채 히로시마에서의 첫해는 그렇게 끝났다.
1978년에 장명부는 팀내 최다승인 동시에 개인 최다승인 15승에 230이닝을 던지면서 일약 팀의 에이스로 화려한 부활쇼를 보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1979년에는 전년의 무리한 영향으로 7승 9패 1세이브로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처음으로 100탈삼진 이상을 잡는 등 구위 자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팀도 2년만에 리그 왕좌를 탈환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했고, 킨테츠 버펄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 선발 투수로 등판해서 완투승을 거두면서 팀이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는데 기여하였다.
1980년에도 장명부는 팀내 최다승인 15승 6패를 거두면서 처음으로 개인 타이틀인 승률왕을 차지하는 등 카프가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전년도에 이어서 킨테츠 버팔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에 선발 등판해서 1완투승을 거둔 장명부의 활약 등으로, 카프는 복수에 불타던 버펄로스를 2년 연속으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제압하면서 2년 연속 일본 시리즈를 제패하였다.
1981년에도 그는 12승 9패를 기록하는 등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을 이어갔다. 1982년에는 이상하게도 승운이 없던 그는 3승 11패 2세이브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두고 있던 7월 10일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시즌을 조기에 마감하였다. 생각 이상으로 허리 부상이 심각해서, 재기여부가 불투명했지만, 언제나 오뚝이처럼 일어선 그이기에 그 누구도 그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2월 22일 장명부는 전격적으로 은퇴 선언을 하면서 더 이상 그의 모습을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1970년에 1군무대에 데뷔한 장명부는 통산 91승 84패 9세이브 방어율 3.69 등을 일본프로야구에서 기록하였다. 프로에 입단할 때부터 언론과 팬들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없었지만, 팀의 간판 투수로 100이닝 이상을 언제나 소화한 그는 마운드의 음지에서 팀을 위해서 노력한 그런 선수였다.
그가 전격적으로 은퇴 선언을 한 것은 부상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통산 100승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팀 내의 젊은 투수들의 성장 등을 생각하면 앞으로 자신은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갓 프로야구가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에 가기 위한 신변 정리였기도 했다.
장명부가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이유때문만은 아니었다. 요미우리와 난카이, 히로시마 등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에이스로서 팬들의 각광을 받은 적도 없었기에, 지도자로서 일본에서 활약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신의 경험과 앞으로 물 밀듯이 진출할 한국계 선수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했다.
철인29호라고 불리운 사나이
한국 프로야구에 진출한다면, 최강팀이나 최약체에 가고 싶었던 장명부는 자신의 바램대로 탈 꼴찌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유니폼을 입었다. 최강의 팀에 가서 한국의 우수한 선수들과 함께 최고의 명문 구단을 만들거나 가장 약한 팀에 가게 되다면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시켜서 만년 조연에 머물렀던 그의 삶에 최초로 주연을 맡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91승을 거둔 장명부의 한국행으로 미국 마이너리그 출신으로 OB 베어스를 1982년에 우승으로 이끈 박철순과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강속구 투수인 최동원이 벌일 한미일 투수 대결에 언론과 팬들은 관심이 모아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강속구 투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힘의 야구가 미덕이던 시대로, 불같은 강속구로서 타자와 정면 승부를 펼치는 투수야말로 진정한 대투수이고, 변화구로 요리조리 피하는 기교파 투수는 비겁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초 장명부에 대해서도 한국에서는 강속구 투수로 오해해서, 그의 강속구를 기존의 타자들이 배트에 맞출 수 있을지, 그리고 최동원과 박철순 등과 펼칠 한미일의 스피드 경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소문만 무성하던 장명부가 한국의 야구팬들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 느낀 감정은 아마도 배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유명한 그의 엉거주춤한 투구 동작과 스리쿼터에서 던져진 파리가 날아가는 듯한 아리랑 볼은 강속구 투수로서 장명부를 상상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도 거액이지만 1억원 이상의 거금을 받아서 '1억원의 사나이'로 불렸던 장명부였기에, 사람들은 일본의 퇴물을 거액을 주고 데리고 왔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장명부의 공은 배트가 아닌 파리채로도 칠 수 있다는 평가 속에서 1983년 시즌은 시작되었다. 분명히 장명부의 공은 공략이 가능했고 실제로 안타는 쳤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점수를 뺏지 못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또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에게 장명부가 나오면 이긴다는 '장명부 효과'까지 더해지면서 장명부는 승리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무너지면 뒤를 막아줄 투수도, 또한 임호균을 제외하고는 믿을 수 있는 선발 투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명부는 선발로 나와서 완투한 후에 다음날에 다시 구원으로 등판하는 등 원맨쇼에 가까운 대활약을 펼쳤다. 그가 한시즌 최다승인 30승을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지금이라면 투수의 기본 중의 기본인 체인지 오프 페이스 - 볼속도의 완급 조절과 투구폼의 변화를 통해서 타자들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어냈고, 또한 역회전 볼을 과감하게 던지는 등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몸쪽 승부를 펼친 결과였다.
능글능글한 외모와 자포 자기한 듯한 투구폼, 그리고 타자의 심리를 꿰뚫는 볼 배합 등으로 사람들은 장명부를 어느 순간부터 '너구리'라고 불렀다. 게다가, 장명부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까닭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야구판의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몸쪽 역회전 볼 등을 통한 몸쪽 승부는 빈볼 시비를 불러왔고, 또한 홈런 등을 맞았을 때에 글러브를 던지거나 심판의 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등 그의 격한 행동에 대해서 한국의 언론들은 "실력은 있을지 몰라도 지나치게 안하무인하다"던지 "동업자 의식이 없다"던지 "자신밖에 모른다"던지 등으로 비난을 퍼부었고, 그를 '악의 존재'로 만들었다.
장명부의 성공 시대는 1982년에 벌어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일본을 꺽고 우승한 한국이 일본 프로야구 출신의 노장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장명부는 한국 프로야구의 스타가 아닌 타도할 대상이 되었다. 자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비난과 한국에서도 '우리'가 되지 못하고 '너희'로 취급되는 상황에 적지 않게 당혹감도 느꼈지만, 오히려 그는 그렇다면 그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성적을 남겨주겠다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전후기 통합 우승을 노리던 장명부의 슈퍼스타즈는 김진영 감독의 구속 등으로 급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으로 전기리그의 막은 내렸다. 한국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는 마지막 티켓인 후기리그의 우승을 향해 질주하던 슈퍼맨들은 김진영 감독의 근신으로 팀의 중심이 된 백인천 코치겸 선수의 사생활 문제로 구속되고, 몇 번의 이해하기 어려운 판정 등으로 다시 한번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1983년에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몰고 온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치면서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기나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국 시리즈가 끝나고 김무종과 포옹하면서 울먹이던 장명부의 모습은 이제는 20년 이상이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흘린 눈물이 지금 현재도 유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목표로 했던 꼴찌팀인 슈퍼스타즈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1983년에 보인 장명부의 활약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슈퍼스타즈가 치룬 총 100경기 중에서 60경기에 등판한 그는 무려 427과 1/3이닝을 던지면서 30승 16패 6세이브 방어율 2.34 등을 기록하였다.
장명부가 거둔 한시즌 30승을 평가절하시키기 위해서, 보너스 1억원이 걸린 30승을 채우기 위해서 바람잡이 선발투수를 기용해서 이길 것 같은 경기에 구원으로 등판해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근거도 없는 비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인간들도 있지만, 그것은 그가 기록한 30승 중에서 선발승이 28승(이 중 26승이 완투승)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1984년에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27승을 거둔 최동원이 51경기에 등판해서 284와 2/3이닝을 던진 것을 생각하면, 1983년의 장명부는 너구리가 아닌 철인 28호 아니 29호였다.
혹자들은 장명부가 슈퍼스타즈가 아닌 라이온즈나 청룡 등과 같은 강 팀에 있었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장명부는 슈퍼스타즈의 유니폼을 입었기에 자신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장명부가 한국행을 결정한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닌 프로에 대한 인식조차 생소한 한국에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1982년에 한국에서도 프로야구가 시작되었지만, 프로야구 이전에도 출신 고교의 이름 아래에 모여서 대항전을 치렀고, 지역 연고를 중심으로 선수들을 구성한 각 구단이었기에 내부적으로 학연을 중심으로 한 선후배 의식이 매우 강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연고지인 인천에도 인천고와 동산고라는 두 야구 명문고를 중심으로 한 좋게 말해서 선의의 라이벌 의식 - 갈등이 있었지만, 1982년의 처참한 성적과 스타플레이의 부재 등으로 학연을 중심으로 한 대립이 다른 구단에 비해서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별 문제 없이 장명부를 중심으로 슈퍼스타즈는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또한 장명부 자신도 1983년 한해로 야구인생에 종지부를 찍게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
// 손윤 기자(블로그 : yago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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