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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18:41
'영원한 이방인' 장명부 (2)
[야구타임스 ㅣ 손윤 기자] 1983년의 한국 프로야구는 대이변의 한 해였다. 전년도 우승팀인 OB 베어스와 영원한 우승 후보라는 달갑지 않는 꼬리표를 단 삼성 라이온즈가 대몰락한데다가, 최동원의 영입으로 기대치가 한껏 부풀었던 롯데 자이언츠가 아닌 해태 타이거즈와 MBC 청룡이 각각 전후기리그를 제패하였다. 한국시리즈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보너스의 지급 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은 MBC 청룡에게 완승을 거두면서 격변의 한 해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1983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팀은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해태 타이거즈가 아닌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1982년에 전후기를 합쳐서 15승(65패)밖에 거두지 못한 슈퍼스타즈가 타이거즈와 청룡에게 아쉽게 밀려서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무려 52승 47패 1무를 기록할 것이라고는 미아리의 벼락맞은 대추나무집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1982년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전력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승리의 기쁨을 맛 본 슈퍼스타즈의 1983년도 사실은 시즌 전에는 암울함 그 자체였다. 임호균과 김진우라는 국가대표 배터리와 베어스의 동냥으로 정구선 등이 보강되었지만, 타 팀의 전력보강과 비교하면 전력보강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결국 구단간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KBO는 슈퍼스타즈와 타이거즈에게 로또를 구입할 기회를 주었고, 슈퍼스타즈는 울며 겨자먹기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 반신반의했던 로또는 대박을 터트려서 아마 한국프로야구에서 앞으로 깨지지 않을 30승을 슈퍼스타즈에게 안겨 주었다. 그 로또의 이름은 '너구리'라는 별명으로 친숙한 장명부였다.
너구리라면에는 너구리가 없다
시즌이 끝난 후에 장명부의 경이적인 활약에 자극을 받은 각 팀들은 전력 보강을 위해서 일본으로 날아갔고, 만년 우승 후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서 삼성 라이온즈는 요미우리의 에이스였던 김일융을 OB 베어스와의 치열한 쟁탈전 끝에 영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에 이어서 장명부와 김일융의 제2 라운드가 바다 건너 한국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30승을 할 경우에 보너스로 1억원을 주겠다는 구단 사장의 약속이 부도 수표가 되면서 장명부는 분노를 넘어서 한국 사회 자체에 대한 실망감을 느꼈다.
'돈은 돈이고 야구는 야구'이기 때문에, 김진영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 아래에 장명부는 투수 코치를 겸하게 되었고, 1983년에 이루지 못한 우승에 대한 아쉬움과 이기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 구단에 몇가지 요구를 하였다. 그 요구는 자신과 함께 마운드를 지켰던 임호균의 트레이드를 통한 전력보강과 일본에서의 전지훈련 등이었다.
최계훈 외에는 특별한 신인 보강이 없었던 슈퍼스타즈로서는 임호균과 이광길의 트레이드를 통해서 권두조, 김정수, 박정후, 우경하, 김호근 등과 해태에서 신태중을 영입하는 등 마운드와 내야진를 두텁게 하면서 장기레이스를 대비하였다.
수비의 핵인 유격수를 맡았던 이영구를 원래의 포지션인 3루로 돌리고, 수비력이 좋은 안정된 권두조에게 유격수를 맡기면서 기존의 정구선과 함께 안정된 미들 내야진을 갖출 수 있었고, 임호균의 공백은 정성만과 박정후, 신태중 등을 장명부 본인이 직접 조련해서 공백을 메우겠다는 구상이었다. 장명부의 슈퍼스타즈는 팔도 유람단과 같았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하기 전까지 트레이드를 통해서 지역색을 없앤 구단을 만들어냈다.
장명부는 "프로는 실력으로 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인천야구의 대부로 실업 야구 시절에는 해병대의 감독을 역임했던 김진영 감독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OB 베어스를 제외한 5개 구단이 해외 전지 훈련을 가졌고, 괌으로 날아간 롯데 자이언츠를 제외한 삼성 라이온즈, MBC 청룡, 해태 타이거스, 삼미 슈퍼스타즈가 일본에서 구슬 땀을 흘렸다.
특히, 슈퍼스타즈는 다른 팀들이 거의 단독으로 훈련하면서 일본 팀과 겨우 친선경기를 몇 경기밖에 치루지 못한 것에 비해서, 장명부의 연줄로 히로시마 카프와 합동 훈련을 하면서 선진 프로 야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트레이드와 전지 훈련 등을 통해서 슈퍼스타즈의 선수단 전체의 전력은 플러스가 되었지만, 팀 승리의 70% 이상을 차지한 장명부의 지나친 혹사에 따른 후유증과 임호균의 공백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였다. 기대와 우려 속에 우승 후보(?) 슈퍼스타즈의 1984년 시즌은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개막전 상대는 전년도에 내환으로 자멸했던 삼성 라이온즈로, 기존의 김시진, 권영호, 황규봉 등에 김일융과 김성래, 진동한 등이 보강된 막강한 선수층에 베어스를 우승으로 이끈 김영덕을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강력한 우승 후보다운 전력이었다. 8 : 5로 뒤진 9회 말에 구원으로 나온 김일융을 금광옥이 3점홈런으로 두들기면서 동점을 만드는 등 슈퍼스타즈는 분전했지만, 10회 연장 끝에 한점 차 패배를 당하였다.
1984년에 슈퍼스타즈는 전년도의 돌풍을 이어가지 못하고, 전후기 모두다 꼴찌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슈퍼맨들이 추락한 원인은 역시 장명부가 전년도만큼의 활약을 펼쳐주지 못했고, 신인인 최계훈이 분전했지만 임호균의 공백을 메우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30승에 따른 보너스 문제로 장명부가 태업을 했다는 말들도 있지만, 태업이라기 보다는 1982년에 일본에서 당한 부상과 1983년의 무리한 혹사의 후유증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사진 제공 : 롯데 자이언츠]
장명부의 '애제자 3인방'으로 불리면서 기대를 모았던 정성만은 8승을, 보크 논란 등으로 페이스가 흔들렸던 박정후는 5승을 거두는 등 일정한 제역할을 수행했지만, '불펜 에이스'로 유명했던 신태중이 시즌 개막 직전에 당한 부상과 새가슴을 극복하지 못하고 1승밖에 거두지 못한 것도 슈퍼스타즈가 몰락한 한 원인이 되었다. 임호균의 트레이드 없이 선수 보강이 가능했다면, 혹은 임호균급의 투수가 한 명만 더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한해였다.
작년과는 달리 패하는 날이 더 많아지면서 장명부에 대한 평가는 더욱 더 나빠졌다. 김진영 감독의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무시한다거나 석연치 않은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나타내면 "역시 장명부는 오만불손하다"는 등 1984년에도 여전히 장명부는 '우리'가 아닌 '너희'였다.
장명부가 가진 한국 프로야구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아마도 자신과 같이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들을 스카우트한 것은 자신들의 기량과 경험 등을 통해서 한국 프로야구 전체가 발전하기 위해서인데도, 현실은 오로지 자신(들)을 쓰러뜨려야만 하는 상대로 취급하는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부분은 장명부의 오해였다. 한국 프로야구(KBO나 구단)에서 원래부터 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장명부와 같은 해외에서 활동한 선수들이 필요했던 것은 흥행을 위해서 그리고 팀의 우승을 위한 우승 청부업자로서 존재 가치가 있었을 뿐이었다. 즉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영원한 이방인
천당과 지옥을 한번씩 맛 본 장명부였지만, 슈퍼스타즈에서 여전히 믿을 언덕은 그가 유일했기에, 1985년에도 슈퍼맨들의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슈퍼맨의 리턴'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시범 경기에서 뜻밖에도 1위를 차지하였고, 개막전에서도 전년도의 우승팀인 자이언츠의 최동원을 무너뜨리면서 승리를 거두는 등 슈퍼스타즈는 산뜻한 출발을 보였다. 팬들은 올해는 작년과는 다른 모습에 들떴지만, 돌아온 것은 개막전 이후 18연패였다. 공격의 핵인 양승관과 김진우 등이 부상으로 빠졌고, 지리한 연봉 협상 등으로 장명부의 몸상태도 정상이 아니었기에 슈퍼스타즈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국, 모기업인 삼미의 부도로 전기 리그를 끝으로 청보가 인수하면서, 슈퍼맨과 원더우먼 사이에서 마린보이가 태어날 줄 알았는데 웬걸 조랑말이 태어났다. 후기 리그에서는 그래도 분전한 핀토스는 베어스와 청룡을 밀어내면서 4위를 차지하면서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품을 수 있었다. 장명부는 45경기에 등판해서 246이닝을 소화하면서, 11승 25패 5세이브 방어율 5.30 등을 기록하였다.
25패라는 패수도 문제이지만, 방어율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을 보면 1983년과 1984년에 무리한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구단의 입장에서는 너구리 인형의 배터리를 오래가는 신제품으로 교환해야 할지 아니면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인형 자체를 바꿀지를 선택해야할 시점이었다.
'새술은 새부대'라는 말처럼 청보 핀토스는 슈퍼스타즈의 이미지가 강한 장명부보다는 새로운 선수를 선호하였고, 결국 장명부와 이영구 대신에 빅3로 손꼽히던 김기태와 김신부 등을 영입하였다.
토사구팽이라고 할지, 아니면 전혀 프로다움을 보이지 못하던 구단이 처음으로 프로다움을 보였다고 할지 장명부는 새로운 둥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운좋게도 신생팀인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하면서, 1986년에는 독수리 오형제에 찬조출연할 수 있었다.
이글스가 장명부를 선택한 것은 신생팀으로서 기존 팀들로부터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학 야구를 주름잡았던 민문식과 한희민, 이상군, 이효봉 등이 입단했지만 프로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는 미지수였기에, 프로야구를 경험한 노련한 투수가 필요했다.
매년 성적이 추락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는 장명부는 구단 상층부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재활용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글스의 바램과는 달리 장명부는 1986년에 어느 정도 승운이 없었던 관계도 있었지만 개인 최다 연패인 15연패를 포함해서 1승 18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2년 계약에 연봉도 미리 지급된 관계로 이글스는 1987년에도 울며 겨자먹기로 그를 계속해서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로 경험이 없던 배성서 감독과의 심각한 마찰을 보이면서, 장명부는 선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은퇴 후에는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라이온즈의 감독이던 박영길의 추천으로 투수 인스트럭터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1990년에는 삼미 슈퍼스타즈로 인연을 맺은 김진영이 롯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투수 코치로 기용되기도 하는 등 다시 한번 그라운드의 품에 안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진영 감독의 퇴진과 함께 그도 보따리를 살 수 밖에 없었다. 한 동안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사라졌던 장명부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받은 것은 1991년 5월이었다. 성낙수와 함께 마약 사범으로 구속된 것이다.
KBO로부터 영구제명된 그는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택시 운전수를 한다던지 노가다 판을 전전하고 있다던지 하는 소문만 무성하였다. 장명부는 한국에서의 짧은 생활 동안에 상당한 액수의 돈을 벌었지만 사기로 날리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그가 마약의 검은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픈 몸과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던 한국 프로야구와 한국 사회로부터 돌아온 뿌리 깊은 차별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츠하라 아키오로 태어나서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후쿠시 아키오로 다시 후쿠시 히로아키로 개명하는 등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국적 변경을 한 후에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으로 온 장명부를 떠올릴 때마다 '보노보노'의 너부리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너구리 라면에는 여전히 너구리 고기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소식을 도저히 알 수 없던 그가 2005년 4월 13일에 자신이 점장으로 있던 마작 하우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더 이상 검은 얼굴로 인해 더욱 더 희게만 느껴졌던 흰 이빨을 드러낸 수줍은 미소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울 뿐이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손윤 기자(블로그 : yagoo.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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