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석 야구스페셜] 승부치기 도입, 메이저리그의 프라이드는 어디로?
[야구타임스 | 김홍석 기자] “승부라는 것에 있어 무승부란 없다”
이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야구 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의 기본 원칙이자 그들만의 자존심이다. 순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우천 등으로 연기된 정규시즌 최종전은 아예 생략하기도 하지만, 일단 시작된 경기는 끝장을 본다.
지난해 4월 17일 콜로라도 로키스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연장 22회까지 가는 피 말리는 접전 끝에 2:1로 힘겹게 승리한 바 있다. 경기 시간은 무려 6시간 16분으로 현지 시각으로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종료되었다.
역대 최장 경기 기록은 1984년 5월 8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밀워키 브루어스 간의 경기로 연장 25회까지 8시간 6분 동안이나 걸려 승부를 가렸다. 경기는 시카고가 7:6으로 이겼다. 마이너리그에서는 33이닝 동안 경기를 치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실질적인 주체가 되어 주관하는 대회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다. 헌데 그런 대회에 일명 승부치기(타이 브레이크) 제도가 도입된단다.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이 승부치기 제도를 축구의 승부차기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성질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발 물러서서 일단은 동일한 것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축구에서 승부차기로 인해 결정된 경기는 어떻게 기록될까?
승부차기는 다음 라운드의 진출자를 가리는 역할을 할 뿐, 그 자체가 실력에 따른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의 전적은 3승 2무 2패로 기록되었다. 승부차기로 승패가 결정된 8강 스페인전이 공식적으로는 무승부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이를 승부치기에 동일하게 적용하자면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실질적으로 ‘무승부’를 용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더욱이 축구의 승부차기는 일반적으로 토너먼트 상황에서만 적용하지만, 이번 WBC에서의 승부치기 제도는 조별 라운드에서의 적용만 확정되었을 뿐, 토너먼트인 준결승과 결승전에서의 적용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대회 실행위원회에서 결정된 주요 대회요강을 살펴보면 대부분 메이저리그의 관례를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홈런 타구에 대한 비디오 판독 제도의 도입이나, 주루코치의 헬멧 착용, 그리고 선발투수 예고제 등은 메이저리그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투구수 제한이요 다른 하나는 승부치기 제도의 도입이다.
1회 대회와 마찬가지로 이번 대회에도 투수들의 투구수가 제한된다. 1라운드에서는 70개, 2라운드는 85개, 준결승과 결승은 100개까지로 한정되어 있다. 지난번의 65-80-90보다는 완화된 것이지만,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 대부분이 프로인 마당에 이런 것을 ‘규정’으로 정해놓는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야구 대회가 마치 아마추어 유소년 대회에서나 어울릴 법한 유치한 규정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나마 이 규정은 일부 감독들의 승부에 대한 집착이 투수 혹사로 이어질까를 염려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은 시드니 올림픽 3,4위전에서 155구를 던지며 완투한 구대성의 투혼을 바탕으로 동메달을 획득한 적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승부치기는 어떤 명분을 들이대더라도 ‘야구의 본질’을 해친다는 점에서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번 대회에서의 승부치기 규정은 올림픽 때와는 조금 다르다. 올림픽 때는 연장 11회부터 무사 1,2루 상황에서, 그것도 타순의 시작을 한차례 임의로 바꿀 수 있었다.(예를 들자면 8번 타자에서 10회가 끝났다 하더라도, 11회에는 1번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WBC에서 승부치기는 연장 13회부터 시작되며, 타순도 12회에서 연결되어 그대로 이어진다.
사실 이 정도 룰이라면 실제로 승부치기가 벌어지는 시합이 나올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승부치기는 일종의 편법이다. 제한된 시간 내에서 경기를 일찍 끝내기 위해 ‘비정상적인 상황’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현지에서의 반응도 신통찮다. 많은 전문가들과 대다수의 팬들이 이 제도의 도입을 보곤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주최 측인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이것을 스스로 도입하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적어도 미국의 야구팬이 느끼기에 승부치기라는 제도는 ‘동전 던지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홈 & 어웨이의 방식이 없는 메이저리그는 포스트시즌 진출 팀을 가리기 위한 최종 결정전에서의 홈필드 어드벤티지를 동전 던지기로 결정해왔다.)
사실 대회를 준비하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그다지 속편한 입장이 아니다. 1회 대회에 이어 2회 대회에도 최정상급 선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불참을 선언했고, 각 구단들도 주축 선수들의 참가를 꺼리는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표로 출장한 주축 선수가 큰 부상이라도 당하면 당장 한 해 농사를 망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만약 이번 대회 이후에도 큰 부상을 당해 고생하는 선수나 컨디션 난조 등의 후유증을 앓는 선수가 많이 생겨난다면, 이와 같은 기피 현상은 다음 대회 때 더욱 심해질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세계화’를 원하는 사무국과는 와는 달리 선수들과 구단은 실속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 대표로 출장하는 추신수를 대하는 클리블랜드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목적(WBC 혹은 아시안 게임을 통한 군면제)이 있기 때문에 출장은 허락하지만, 무리하게 뛰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투구수 제한이나 승부치기 제도의 도입은 모두 다 메이저리그의 각 구단을 달래기 위한 규정임을 알 수 있다. 대회도 흥행시키고 싶고, 참가하는 메이저리그의 스타급 플레이어도 보호하고 싶은 사무국이 딜레마를 벗어날 자구책으로 들고 나온 카드라는 뜻이다.
‘끝장 승부’를 철칙으로 삼고, 세계 최고의 ‘프로’ 선수들이 뛰는 곳이 바로 메이저리그라는 세계다. 그런 리그를 통솔하는 사무국이 ‘승부치기’라는 편법과 프로에게 요구하기 다소 부끄러운 ‘투구수 제한’이라는 규정을 내세웠다는 것은 WBC라는 대회의 권위를 떨어뜨릴 뿐이다.
세계의 수많은 야구팬들로부터 진정으로 인정받는 최고의 대회로 WBC를 유지하고 싶다면, 메이저리그 사무국측은 좀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 이대로는 곤란하다.
// 김홍석 기자(블로그 : MLBspeci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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