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타임스 | 김현희 객원기자] ‘국민감독’으로 칭송받는 김인식 한화이글스 감독이 지난 5일, KIA 타이거즈와의 홈경기에서 개인 통산 2,000경기 출장의 금자탑을 세웠다. 국내 감독 가운데 김응용(2679경기), 김성근(2048경기)에 이어 3번째 영광이다.

김인식 감독은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91~92년)의 창단 감독으로 감독생활을 시작해 OB-두산 베어스(95~2003년)를 거치면서 두 번의 우승을 경험했고, 2005년부터는 한화 이글스를 이끌고 있다.

감독 생활만 올해로 16년째. 지역을 따지지 않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언제든 달려갔고, 모두가 꺼려하는 WBC 감독을 두 번이나 맡아 좋은 성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몇 안 되는 ‘전국구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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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에서 덕장으로

김인식 감독은 현역 시절, 김소식(전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등과 함께 장래가 촉망되는 투수로 인정받았던 선수였다. 1965년 크라운 맥주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김인식은 해병대 야구단(1966-1968년)을 거쳐 1969년부터 3년간 한일은행 선수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어깨부상으로 인해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던 김인식은 스물여섯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모교 배문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게 된다. 이때부터 ‘지도자 김인식’의 37년 야구인생이 시작된 셈이었다.

젊은 시절의 김인식 감독은 지금의 ‘덕장’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다혈질 용장’이었다. 모교 그라운드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큰 목소리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는 상문고등학교(1978-80년)와 동국대학교(1982-85년) 감독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호랑이 감독’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12년간 후학 양성에 힘써왔던 김인식 감독은 1986년부터 김응용 감독(현 삼성 라이온스 사장)의 부름을 받아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의 수석 코치직을 맡게 된다. 그리고 그가 해태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팀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놓치지 않고, 1989년까지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김응용-김인식 콤비는 그렇게 ‘해태 왕국’을 완성했다. 이 당시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인식 감독은 1991년을 기점으로 리그에 합류하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 감독을 맡게 된다.

당시 마흔 셋에 불과했던 김인식 감독은 여전히 젊음을 과시했다. 불같은 열정으로 선수들을 독려했던 그는 매 경기마다 선수들에게 ‘승부에서 지더라도 기는 죽지 말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신생팀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김인식 감독은 2년간 93승 155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간직한 채 쌍방울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그랬던 김 감독을 다시 현장으로 부른 것은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였다. 당시 하위권을 전전했던 OB는 김인식을 신임 감독으로 임명하며 팀을 맡겼다. 그리고 김인식 감독은 1995년 취임과 동시에 전년도 7위(53승 72패 1무)였던 팀을 페넌트레이스 1위(74승 47패 5무)로 견인하고 마침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루는 기염을 토했다. 비로소 ‘김인식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김인식 감독은 2003년까지 OB-두산 베어스 감독을 맡았다(1999년도에 팀 명칭 변경). 자신의 감독 생활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베어스 감독 시절, 김 감독은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1995, 2001 시즌)을 포함하여 팀을 다섯 번이나 가을 잔치에 이끌었다. 이는 역대 베어스 감독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성적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50번째 생일을 맞이했던 김 감독은 이때부터 선수들을 윽박지르거나 불같은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예전 같지 않았던 자신의 건강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끝까지 선수들을 믿고, 많은 기회를 부여했던 김인식 감독은 이때부터 ‘진정한 덕장’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 ‘덕장 김인식’, 국민감독으로 거듭나다

김인식 감독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김응용 감독과 다시 만나 코치직을 훌륭하게 수행했고(당시 동메달 획득),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처음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며 조국에 금메달을 선사했다. 국가대표 감독직 데뷔전을 훌륭하게 치른 김 감독은 이때부터 서서히 ‘국민감독’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3년을 끝으로 두산 베어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김인식 감독은 자신의 후계자로 선동열 당시 KBO 홍보위원을 지목하기도 했다. 후배에게 감독 자리를 물려주고 본인은 일선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은 선동열 대신 김경문 감독이 이으면서 팀을 다시 일으켰다.

이후 김인식 감독이 자리를 옮긴 곳은 한화 이글스였다.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에게 김인식 카드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2005년부터 한화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김인식 감독은 2007년까지 3년 연속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문동환, 정민철, 송진우, 구대성 등은 이 시기에 특히 더 빛났던 노장들이었다. 당시 MBC-ESPN 해설위원을 맡았던 조성민 역시 김인식 감독의 부름에 잠시나마 한화 유니폼을 입으며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기도 했다.

그런 김인식 감독에게 KBO는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하 WBC)의 수장 자리를 맡겼다. 당시 김재박, 선동열 등 ‘감독급 코치진’들이 즐비했던 국가대표팀은 일본을 두 번이나 격파하는 등 승승장구한 끝에 4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때부터 국민들은 김인식 감독에게 ‘국민감독’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며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이상 국가대표팀을 맡지 않겠다’던 김인식 ‘국민감독’은 남들이 서로 안 하겠다던 제2회 WBC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다시 한 번 수락해야 했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감독급 코치진’의 구성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국가대표팀을 맡은 김인식 감독은 1회 대회 때보다 더 좋은, ‘준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며 세계를 다시 한 번 더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일본을 다섯 번이나 만나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플레이를 펼치자 하라 감독은 “더 이상 한국을 국제무대에서 만나기 싫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6일 현재까지 김인식 감독은 프로통산 960승 995패 45무를 기록 중이다. 쌍방울 레이더스를 포함하여 항상 팀이 어렵던 시기에 감독직을 수행하며 팀을 이끌었기에 5할 승률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올해도 한화 이글스는 주축 선수들이 부상으로 빠지는 등 갖은 어려움 속에 최하위를 달리고 있다. 아쉬움은 남지만, 어쩌면 그것이 그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김인식 감독이 어떠한 성적을 내건 간에 많은 야구팬들은 2009년 WBC 당시에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 감독에게 끊임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 감독’이라는 칭호는 아무에게나 붙여 주는 것이 아니다.

// 김현희 객원기자
<사진=한화 이글스 구단 제공>
야구타임스 김홍석 편집기자(블로그 : MLBspeci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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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Daum 스포츠 해외야구 섹션 전문 칼럼니스트
전 데일리안 스포츠 메이저리그 전문 객원기자
현재 야구타임스 편집기자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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