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메이저리그 5선발의 생리를 극복하라
[야구타임스 | 김홍석] 스테로이드 사용을 의심받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자백하고, 한 때 메이저리그 최고의 2루수로 칭송받았던 로베르토 알로마가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등 지금 메이저리그는 안팎으로 매우 시끄러운 상황이다.
하지만 그와 관계없이 야구는 계속된다. 지금은 2월 중순, 메이저리그 팀들의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며 본격적으로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다.
국내 메이저리그 팬들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이적한 박찬호의 5선발 낙점 여부다. 또 한 명의 코리안 메이저리거인 추신수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주전 우익수 겸 중심타자로 활약하게 될 것이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박찬호는 스프링캠프를 통해 치열한 경쟁을 치르게 될 예정이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은 곱지 않다.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미국 현지 언론은 박찬호의 보직을 선발투수보다는 구원투수로 몰아가려 하고 있다. 현지의 언론과 팬들이 원하는 것은 박찬호처럼 나이 많은 노장이 아니라 현재 가장 유력한 5선발 후보로 꼽히고 있는 J.A. 햅(26)처럼 젊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선수다.
▶ 1997년의 박찬호와 톰 캔디오티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7년은 박찬호에게 잊을 수 없는 한해일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풀타임 선발투수가 되어 맹활약했던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스프링캠프를 통해 톰 캔디오티라는 경쟁자를 물리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1983년에 데뷔한 캔디오티는 당시 메이저리그 15년차의 베테랑 선발투수였고, 구원투수로의 경험이 전혀 없는 전형적인 선발투수였다. 특히 캔디오티는 너클볼이 주무기였으며, 그러한 너클볼러가 구원투수로 뛰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97년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고, 96년에 9승 11패 방어율 4.49의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 드는 바람에 위기를 맞이했다.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첫 풀타임 시즌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젊은 박찬호와 경쟁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당시 언론과 팬들은 팀의 미래를 책임질 것으로 기대되는 박찬호의 편이었다. ‘24살의 박찬호는 선발투수로서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호의적인 시선 속에 박찬호는 스프링캠프를 치렀고, 마침내 캔디오티에게서 5선발 자리를 빼앗아왔다.
캔디오티가 97년에 받기로 되어 있었던 연봉은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인 300만 달러, 빌 러셀 감독이 많은 연봉을 받는 40세의 베테랑 선발 투수를 밀어내고 경험 없는 새파란 신인을 5선발로 낙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팬들은 비난하기는커녕 기대를 담은 응원의 박수를 보내줬을 뿐이다.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40세 노장 투수의 첫 구원투수 도전’이라는 불안 요소보다는 젊고 유망한 젊은 투수가 5선발이 되어 팀의 밝은 미래를 준비해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메이저리그의 ‘다섯 번째 선발 투수’라는 보직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 2009년의 박찬호와 J.A. 햅
시간이 흘러 당시로부터 12살을 더 먹은 박찬호는 필라델피아 소속의 36살의 베테랑 선발투수가 됐다. 그리고 그 앞에는 햅을 비롯해 카일 켄드릭(25)과 카를로스 카라스코(22) 등의 젊은 유망주들이 5선발 자리를 다툴 경쟁자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박찬호의 입장을 뒤바꿔놓았다. 이제는 오히려 그가 캔디오티의 처지가 되었고, 햅 등이 지난날의 박찬호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이다. 언론의 반응도 마찬가지, 은근히 ‘햅이 5선발이 되어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당초 ‘유망주’라 불릴만한 나이를 지난 햅이 지금처럼 강력한 경쟁자가 될 줄은 몰랐으나, 그를 향한 현지 언론의 시선은 또 달랐다. 미국 현지에서 박찬호가 5선발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한국 교포들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필라델피아라는 팀에는 4명의 안정적인 선발투수가 있으며, 이런 팀은 5선발 자리를 신인에게 주어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설사 그것이 월드시리즈 2연패를 노리는 팀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 미래를 대비하지 않고 당장 올해만 내다보는 야구는 메이저리그에 없다.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로 280경기나 치른 경험이 있다. 하지만 구원투수로의 경력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2002년 이후에 선발등판 한 104번의 경기에서는 방어율 5.48의 미덥지 못한 성적을 기록한 것도 사실이다. 현 시점에서 박찬호의 경력은 아무런 장점이 되지 못하며, 그의 나이는 약점일 뿐이다.
선발투수로의 첫 도전이었던 12년 전보다 훨씬 더 험난한 과정이 스프링캠프를 맞이하는 박찬호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박찬호는 이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5선발 자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 메이저리그에서 다섯 번째 선발투수라는 것은
팻 길릭의 뒤를 이어 필라델피아의 새 단장이 된 루벤 아마로 주니어는 내심 박찬호를 선발 투수로 염두에 두고 영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필라델피아가 아무리 지난해 월드시리즈 우승팀이라고 하더라도 평범한 오른손 구원투수에게 250만 달러라는 연봉을 투자할 정도로 여유 있는 팀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신임 단장의 행보에 지역 언론과 팬들이 제동을 걸었다. 당장 눈앞의 성적에만 급급해 1년 동안만 기용할 선발 투수를 영입했던 초보 단장의 생각과는 달리, 여론은 미래를 향한 투자까지도 함께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박찬호의 영입 이후 언론의 반응에 가장 놀란 사람이 아마로 단장이었을 수도 있다. 신임 단장의 한계다.
현재 5선발 후보인 박찬호를 평가하는 지역 언론과 팬들의 시선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팀은 5선발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하고 박찬호를 영입하였으며, 본인 스스로도 선발투수로 뛰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J.C. 로메로가 50경기 출장정지를 당했기 때문에 구원투수로 활약해주는 편이 팀에게는 더 유익하다. 박찬호는 지난해 구원투수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지만, 다른 선발 유망주들은 구원투수로의 경험이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박찬호가 5선발 자리를 따내기 위해서는 스프링캠프에서 나머지 경쟁자들을 완전히 압도해야 한다. 같은 값이면 어린 투수들에게 기회가 돌아갈 것이다. 에이스가 되기 위해서는 경험과 실적이 필요하지만, 5선발은 패기와 가능성만 있으면 된다. 12년 전의 박찬호가 그랬고, 지난해 LA 다저스에서 최종적으로 5선발 자리를 낙점 받은 클레이튼 커쇼의 경우가 그랬다.
햅 등이 기대에 부응하는 성적을 거두게 된다면, 설사 박찬호가 그들보다 더 좋은 피칭을 했다고 하더라도 5선발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존재한다. 거듭 말하지만 5선발이라는 보직은 그러한 것이다.
▶ 역사란 반드시 되풀이되는 것은 아니다
경험과 실적에서 월등히 앞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점은 단 하나도 없는 상황. 12년 전 동일한 과정을 거처 팀 선배의 자리를 물려받은 박찬호가 이제는 반대의 입장에 처했다는 사실이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역사가 되풀이 되라는 법은 없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선배들의 빈틈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 유망주들의 생리라면, 그러한 유망주들에게 한 번쯤은 ‘실패’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 선배들의 도리가 아니던가.

한국에서라면 ‘은퇴’를 생각해야 할 36살의 나이에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서 젊은 투수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의 팬들은 힘을 얻는다. 15년 전 메이저리그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박찬호는 모든 것이 도전이었다.
올해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도전하는 그의 모습을 향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마음 속 가득히 그의 승리를 기대하면서.
[사진제공 : 홍순국 MLBphotographer.com]
// 김홍석(블로그 : MLBspeci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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