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타임스 | 이준목] 호시노 센이치(현 한신 타이거즈 시니어디렉터)는, 우리나라의 야구팬들 사이에서도 지난 베이징올림픽에서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과 격돌했던 일본대표팀의 수장으로, 그리고 90년대 이종범과 이상훈, 선동열 등이 활약했던 일본 주니치 드래건즈의 감독으로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호시노 감독이 한국계라는 설도 거론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호시노는 일본야구계에서 흔히 ‘열혈남아’로 통한다. 언제 어디서든 할 말은 다하는 직선적인 성격과 강한 카리스마는 다른 누구와도 차별되는 개성으로 일본 야구팬들에게 호시노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호시노의 야구인생은 파란만장하다. 97년에는 아내를 암으로 잃었고, 2003년 한신 타이거스 감독 시절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장례식에 불참한 채 선수들을 지휘하여 리그 우승을 확정짓고 슬픈 헹가래를 받기도 했다. 오직 야구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호시노 감독의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은 2005년 일본 TBS의 전기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열혈남아 호시노의 야구인생

1968년 메이지대학의 에이스였던 호시노는 졸업을 앞두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기로 사전 약속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요미우리 구단은 약속을 깨고 다른 선수를 지명했고, 이에 호시노는 그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후 주니치에 입단한 호시노는 ‘안티 교진’의 선봉장이 되어 요미우리전만 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요미우리의 대표적인 간판스타이자 홈런타자였던 오 사다하루(왕정치)가 타석에 들어설 때면 위협구를 불사하는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다. 호시노는 현역 시절 투수로 활약하며 146승 121패를 기록했고, 이중 무려 35승을 요미우리와의 시합에서 수확하며 안티 요미우리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87년 호시노가 친정팀인 주니치의 사령탑을 통해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에 들어가면서도 요미우리와의 악연은 계속됐다. 호시노는 지휘봉을 잡은 이듬해인 88년 요미우리를 제치고 주니치를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스타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이는 당시 요미우리 사령탑을 맡고 있던 오 사다하루 감독이 돌연 해임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호시노는 주니치 유니폼을 입고 88년과 99년 두 차례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2003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지휘봉을 잡아 한 차례 더 우승을 맛보기도 했다. 특히 한신은 호시노 감독이 지휘봉을 잡기 전까지 11시즌 동안 센트럴리그 꼴찌만 리그 6차례나 기록했던 대표적인 약체팀이었다. 강한 승부근성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혹독하게 조련한 호시노 감독은 한신의 리빌딩에 성공하여 강팀으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일본에서 그는 인기 있는 감독이었다. 성적을 끌어내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할 말 다하는 시원시원한 성격과 강인한 승부근성은, 남자다움과 '장인'을 동경하는 일본야구팬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물러설 줄 모르고 야구만을 바라보면 달려온 호시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오점이 되었던 부분은, ‘큰 경기와 단기전에 약하다’는 징크스였다. 호시노는 센트럴리그 우승을 세 번이나 차지했으나, 7전 4선승제의 일본시리즈에서는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베이징올림픽에서는 본선에서 한국에 두 번이나 덜미를 잡히며 노메달의 굴욕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베이징 대회의 실패는 한때 국민적인 인기감독으로 군림하던 호시노 야구인생의 명예를 바닥까지 추락시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 강력한 불펜 위주의 지키는 야구, 그가 선동열에 미친 영향.

한국에서 알려진 흔히 호시노의 이미지는 ‘악역’에 가깝다. 베이징올림픽 당시 한국야구를 공공연하게 깎아내는 발언으로 신경전을 펼쳤고, 주니치 시절에는 이종범과 씻을 수 없는 악연을 맺기도 했다.

일본의 야구는 한국보다도 더욱 철저한 감독 중심의 야구다. 그만큼 감독이 경기운영이나 선수기용에 대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부분이 많으며, 호시노 감독은 이런 일본야구계에서도 대표적인 ‘강성 지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적과 아군의 구분이 분명한 호시노의 성향은 자신의 지시에 불응하거나 뜻에 맞지 않는 선수에게 손찌검까지도 불사할 만큼 과격한 일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순탄하지 않았던 그의 야구인생 만큼이나 선수들에게 강한 투지와 승부근성을 요구하는 그의 리더십은, 자신과는 뜻이나 입장이 다른 처지에 놓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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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 호시노 감독 아래에서 주니치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함께 이끌었던 이종범과 선동열의 명암이 엇갈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종범에게 호시노는 그저 ‘악몽’의 기억일뿐이지만, 선동열 감독은 현역 시절 호시노 감독 밑에서 전폭적인 신임을 얻었고, 은퇴 후 지도자로서의 야구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선 감독은 지금도 호시노 감독을 ‘은사’로 대접한다.

선동열 감독도 일본 진출 첫해이던 95년 리그 적응에 실패하여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 호시노는 선동열을 2군으로 강등시키고 “그런 식으로 할 바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라”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다. 절치부심한 선동열은 한국시절의 스타의식을 모두 버리고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이듬해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호시노 감독은 선동열을 팀의 주축 선수로 중용하면서, 99년 센트럴리그 우승 확정 당시 선동열을 팀의 마지막 투수로 내보내는 배려를 하기도 했다.

선동열 감독이 은퇴 후 투수코치를 거쳐 삼성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탄탄한 마운드를 통한 ‘지키는 야구’로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일궈낸 것도 호시노 감독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같은 투수출신이었던 호시노와 선동열은 철저하게 불펜을 중시하는 야구철학이나 스타 선수들을 다루는 용인술에서 서로 많이 닮아 있다.

선동열 감독의 해태 시절 은사였던 김응룡 감독이나 호시노 감독은 모두 칭찬에 인색하고 승부처에서의 과감한 선수교체나 결단을 주저하지 않은 냉혹한 용병술이 특징이었다. 초창기 선동열 감독의 용병술은 그러나 호시노 감독과 김응룡 감독의 영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 이종범, 그리고 한국야구와의 악연

하지만 또 다른 한국 선수인 이종범과는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내버려두면 알아서 자기 몫을 해내는 이종범에 비하여, 철저하게 자신이 짜놓은 틀 안에서의 선수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활용하려던 호시노는 물과 기름과도 같았다.

흔히 호시노 감독은 거칠고 독선적인 인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번 믿은 선수에 대해서는 끝까지 신뢰를 거두지 않기로 유명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주니치 시절 수제자이던 이와세 히토키를 부진 속에서도 끝까지 믿고 기용한 뚝심 등이 대표적이다.

호시노 감독도 이종범이 일본 진출 초기 맹활약을 펼칠 때는 “우리 팀의 분위기 메이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종범이 그해 6월 가와지리의 투구에 팔꿈치를 맞은 이후 슬럼프에 빠지자 관계가 틀어졌다. 호시노 감독은 부상의 공포에 위축된 이종범을 이해하고 감싸기보다는 정신력이 부족하다며 못마땅하게 여겼다. “용병선수가 자기 몫을 못한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유 없이 엔트리에서 제외되거나 2군으로 강등시키기 일쑤였다.

용병의 성적을 요구하면서도 이종범을 용병답게 대접하지도 않았다. 외국인 선수들은 참가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던 가을캠프에 참가하기를 요구했으나 이종범은 응하지 않았다. 호시노 감독에게는 그것조차 항명으로 비춰졌다. 일본무대에서의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증까지 생길만큼 정신적으로 지쳐있던 이종범이었지만, 호시노 감독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선수라면 감독이 원하는 스타일에 맞추는 것도 좋은 선수의 능력이라고 봤을 때 이종범에게도 일정 부분의 책임은 있다. 하지만 호시노 감독 또한 이종범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성공한 사람들일수록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포용력의 결핍이 초래한 악연이 아니었을까.

이후 이종범은 미련 없이 일본무대를 정리하고 귀국하여 타이거즈의 전설로 부활했다. 2006년 제1회 WBC에서는 자신의 방망이로 일본을 꺾고 한국을 4강으로 이끄는가 하면, 올해 타이거즈의 ‘V10’을 달성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호시노 감독은 2003년 한신 감독을 끝으로 사령탑에서 물러난 뒤, 대표팀 지휘봉을 잡아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 도전했으나 결과는 노메달의 굴욕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회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입방정’을 떨어서 한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호시노 감독은 베이징 대회의 실패이후 한때 제2회 WBC 감독설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아 끝내 자진사퇴의 수순을 밟아야했다.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호시노 감독은 “일본은 이지메 국가가 됐다. 나를 때리면 돈이 되는 모양”이라며 뉴스프로그램에서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베이징올림픽의 실패는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 시게오의 뒤를 이어 일본의 ‘국가적 야구영웅’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노렸던 호시노 감독의 야구인생과 명예를 산산이 짓밟아 놓았다. 호시노 감독의 야구인생에 애증으로 얽혀있는 한국야구는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 야구타임스 이준목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야구타임스 김홍석 편집인(블로그 : MLBspeci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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