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타임스 ㅣ 손윤 기자]
메이저리그가 출범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년도 더 이전인 1871년에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이라는 프로 리그로 1875년까지 5년동안 존속하였다. 그리고, 1876년에는 내셔널리그가 창설되었다. 사실 최초의 야구 룰인 니커보커스 룰이 제정된 것은 1845년으로, 당시에는 타자가 헛스윙한 것만 스트라이크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에 타자가 치지 않은 볼이라도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을 경우에는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즉, 초창기 야구에서는 스트라이크는 존재했지만, 볼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야구에 볼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1871년이었지만, 당시에는 베이스 온 볼스가 지금과 같은 포볼이 아닌 9볼이었다. 1880년에는 9볼에서 8볼로 줄었고, 1882년에는 7볼로, 1884년에는 6볼로, 1887년에는 5볼로, 그리고 마침내 1889년에 지금과 같이 4볼이 되었다. 이후 약 120년 동안 베이스 온 볼스가 되는 볼의 숫자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베이스 온 볼스를 3볼로 줄이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1년 3월에 미국의 애리조나에서 전지 훈련을 하고 있던 일본 프로야구의 롯데 오리온즈(현 마린스)는 메이저리그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연습 경기를 가졌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양 팀은 빠른 진행을 위해서 3볼이 베이스 온 볼스가 되는 것으로 하였다. 경기 결과는 12안타를 친 오리온즈가 9안타를 친 어슬레틱스를 12 : 6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안타 수에서 단 2개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오리온즈의 투수진이 베이스 온 볼스를 3개밖에 허용하지 않은 것에 비해서, 어슬레틱스는 무려 17의 베이스 온 볼스를 남발했기 때문이다.

야구계가 배출한 최고의 명물

이 경기가 베이스 온 볼스를 4볼이 아닌 3볼로 치루어지게 된 것은 어슬레틱스의 오너인 찰스 핀리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빠른 경기 진행을 위해서 베이스 온 볼스가 되는 볼의 숫자를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연습 경기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의 생각과는 달리 베이스 온 볼스가 속출하면서, 경기 시간은 단축되기는 커녕 늘어만 났다.

시카고에서 세미 프로팀에서 선수로 활약하던 찰스 핀리는 결핵으로 선수 생활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보험업으로 떼돈을 벌었지만,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1960년 12월에 어슬레틱스를 인수하였다. 팀을 매각한 1980년까지 20년 동안 찰스 핀리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이단아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기행을 일삼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신이 고안한 오렌지색 볼을 들고 있는 찰스 핀리. (ⓒ MLB.com 캡쳐 화면)



1965년에 입단한 신인 투수의 이름이 흔한 제임스라는 이유로, 좀 더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메기 낚시가 취미라는 점에 착안해서, 캣피쉬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하였다. 후에 캣피쉬 헌터는 에이스로 성장해서, 어슬레틱스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월드시리즈를 3연패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또한, 어슬레틱스만의 특징을 만들기 위해서 선수들에게 콧수염을 기르게 하였다. 이 장려책으로 롤리 핑거스의 트레이드마크인 멋들진 카이젤 수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63년에는 이전까지 흰색과 검은색, 회색밖에 없던 유니폼에도 컬러 TV 시대에 발맞추어 노란색을 도입하였다.

지명타자의 아버지


그가 고안한 수많은 것 중에서 역사에 남을 최고의 작품은 '지명타자 제도'였다. 평소 "일반적인 투수는 자신의 할머니가 던진 볼도 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투수에게는 상시적인 대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이전까지 9명만이 필드에 나서던 야구에 또 한명의 선수를 등장시키는 지명타자 제도를 아메리칸리그의 오너들에게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 오너들은 만장일치로 찬성하였고, 1973년부터 아메리칸리그에서 실시되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지명타자로 타석에 선 양키스의 론 브롬버그는 "타석과 타석 사이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까지 쭉 글러브를 끼고 수비를 했는데, 갑자기 벤치에 앉아서 다른 선수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된 것이다. 경기에 계속해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론 브롬버그가 지명 타자제도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선수들 중에서 몇 안되는 지지자 중의 한명이었다. 반면에, 론 브롬버그에게 배트를 빼앗긴 투수인 멜 스토틀마이어는 "선수들은 모두다 반대했다. 우리 투수들도 타석에 서서 배트를 휘두르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의 선수들은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너가 지시한 것을 원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1972년에는 유니폼의 색을 이제는 어슬레틱스의 상징과도 같은 녹색으로 바꾸었다. 1973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서 하얀색의 공인구를 컬러풀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3월말에 열린 어슬레틱스와 인디언스의 오픈전에서 오렌지색 공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움에 적응해야 하는 타자들은 물론이고, 투수들도 손에서 볼이 미끄러진다는 등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실제로 도입되지는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찰스 핀리를 비롯한 아메리칸리그의 오너들이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명분이던 홈런의 양산을 통한 화끈한 타격전은 기대와는 달리 경기당 득점이나 홈런수가 큰 폭의 상승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것은 투수를 대신해서 지명타자로 등장한 타자들의 타격이 월등한 우위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라고 해도 스타급 선수가 무제한으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한 대부분 지명타자로 은퇴를 앞둔 베테랑이 출전하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사실 오너들이 지명타자 제도를 도입한 주요한 목적은 타격전을 기반으로 한 흥행에 있었다.

1972년에 아메리칸리그의 경기당 관중수는 12,305명이었지만, 1973년에는 13,821명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아무런 차이도 없던 양대리그에 지명타자의 유무라는 결정적인 특색이 생긴 것이 지명타자 제도의 도입에 따른 최대의 성과였다. 어쨌든 메이저리그에서 이단아 오너였던 찰스 핀리가 관중을 좀 더 야구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제안한 것들 중에서 컬러 유니폼과 지명타자 제도는 메이저리그뿐만이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서 일본과 한국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명타자 제도에 대한 개인적인 선호도는 제각각이겠지만, 큰 변화가 없던 야구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다 준 인물이 찰스 핀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 손윤 기자(블로그 : yagoo.tistory.com)

- Copyrights ⓒ 야구타임스(yagootime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TRACKBACK :: http://yagootimes.com/trackback/66

textcube textcube get rss

야구타임스

TNM'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atter & Media

Tattertools Tatter & Media DesignMyself!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677-6 영남빌딩 8층 등록번호 : 서울아00739 등록일자 : 2009년 1월 14일 발행인 : 명승은 / 편집인 : 김홍석
Copyright 2009 (C)YagooTimes. All Rights Reserved. Powered by TNM. Designed by Qwer999